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 로셸 (문단 편집) ==== 제1차 포위전(1572~1573) ==== [[파일:La_Rochelle_1573.jpg]] 요새화 된 라 로셸. 인구 수에 비해 상당히 잘 요새화된 경우에 속한다. 1568년, 도시는 [[제네바]]의 신정 정치를 모방한 독립을 선포하였다. 시민들 중 일부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빌럼을 도우러 가기도 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전함들은 라 로셸을 기지로 삼아 스페인 선박들을 공격했다. 1571년부터 도시는 프랑스 해군의 봉쇄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도시의 인구는 20,000명이었다. 1572년 8월에 일어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이후 도시는 프랑스 서부 위그노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공성전(1572.11~1573)은 독일이나 영국 등지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일만큼 치열했다. 1573년 2월 11일부터 포위전은 프랑스의 차기 왕위 계승자인 앙주 공작(미래의 [[앙리 3세]])이 맡게 되었고, 근위대장 몽고메리의 함대가 해상 봉쇄를 강화했다. 애초에 포위는 프랑스 측에 유리하였다. 포위군은 28,000명인데 반해 수비군은 1,500명에 그쳤다. 포위군 측에는 고위 귀족, 왕족들(나바라의 앙리, 미래의 [[앙리 4세]] 포함)이 많았고 그중 일부는 전사하기도 했다. 2월부터 6월까지 국왕군은 8번의 대규모 공세를 퍼부었으나 번번이 격퇴되었다. 3월 26일에는 성벽을 파괴할 갱도에서 화약이 잘못 터져 공격군 150명이 때죽음당하기도 했다. 5월 23일에 지원군으로 스위스 용병 6,000명이 도착, 26일에 재차 공세를 펼쳤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4개월간 이어진 8번의 공세에서 20,000명의 병사들이 전사하고, 155명의 장군 중 66명이 죽었으며, 47명이 부상당했다. 하지만 수비 측도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시민들은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1572년에 체결된 블루아 조약(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한 영-프 동맹)을 의식하여 7척의 비정규군을 보내는데 그쳤다.[* 다만 제2차 포위전때, 이것을 기억한 리슐리외가 바다에 거대한 구조물을 세워 지원 선박의 접근을 원천 차단했다.] 한편, 1573년 5월 말에 앙주 공작은 자신이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를 끝냈다. 6월 24일에 평화 조약이 맺어졌고, 7월 6일에 포위군이 후퇴했다. 그리고 7월 중순에 내전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국왕 [[샤를 9세]]는 <불로뉴 칙령>(라로셸 조약)을 반포하여 세 도시(라로셸, [[몽토방]], [[님스]])에서의 신교도의 예배와 믿음을 엄격한 조건하에 허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